#1
파란 하늘은 간데없고 후덥지근한 공기에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5일 내내 들고만 다니다 드디어 쓸모가 생긴 우산은 지하철 보관함에 있었다. 걱정스레 배웅하시는 주방장님이 우산을 줄까 어쩔까 하시길래 금방 그칠 것 같으니 좀 기다렸다가 가죠 뭐 라고 웃으며 답했다. 물론 한국어로... 괜찮다는 말만 일본어로 대답 할 수 있었다....
금방 그칠 것 같은 비라는 걸 주방장님도 알고 나도 알았지만 대화는 하지 못한채 잠시 서 있다가 길을 나섰다.
소나기에 한적해진 골목
#2
몇 방울씩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더운 공기와 시원한 공기가 뒤섞인 거리를 걸었다.
모자를 쓰고 있었고 이런 날씨를 격하게 애정하기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신이났다.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 왔던 길을 되돌아 가던 중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역에서 봤던 풍경은 얼마쯤 하나 봤더니 2천엔.
기념품에 2만원이면 좀 비싸군 싶어서 고민하다가 나왔는데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심지어 공항에서까지 다 못 쓴 엔화가 동전을 제외하니 딱 2천엔.. 이었다.
이렇게 이누야마에 다시 가게 될 이유가 생겼군 흐흐
이누야마의 마지막 사진
생각보다 고양이를 많이 보지 못한 여행이라 더 반가웠다
#3
뮤 스카이를 타기 위해 이누야마역에서 나고야역으로 가는 길에 고민이 있었다.
언니가 간절히 원했던 곤약젤리가, 우스갯소리로 세관에 걸릴 만큼 많이 사오라고 했던 그것을 아직 사지 못한 것이다.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미리 사면 짐이니 마지막 날까지 미뤘던 것인데, 막상 사려고 하니 시간이 촉박해서 포기하고 가야할지 밀어부쳐야할지 고민이 됐다.
더군다나 나고야역에서 가장 가까운 상점 '돈키호테'는 타고가던 노선에서 밖으로 나와 히가시야마선으로 갈아타야하는 위치에 있었다.
지도상의 거리로는 7분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우선 표를 끊고 기차를 탔다.
시간이 없는데 마음이 급하니 엄청나게 집중력이 높아져서 표도 한 번에 끊고 플랫폼까지 한 번에 찾아갔다.
사카에 역에 내려서 발은 빠르게, 머리는 계속 시간 계산을 하며 출구 쪽으로 걷고 있는데 스치듯 쳐다본 가게에 곤약젤리가 있었다!
처음엔 계속 걸었다.
'저건 너무 적은 것 같아. 큰 상점을 가야해'
하지만 이내 마음의 소리가 다시 외쳤다.
'비행기는 놓치면 다음 시간이 없다고. 여긴 한국이 아냐. 깝치지 마'
깝치지 말란 말에 정신이 번뜩 들어서 바로 뒤를 돌아 상점으로 들어갔다.
보이는 대로 아니 정확히는 언니가 사오라고 한 복숭아맛 위주로 열댓개를 품에 안고 계산대로 향했다.
무사히 구매했다는 안도와 동시에 곤약젤리의 무게가 느껴졌다. 젤리.. 무겁구나...
빛이 깊어지기 시작하니 많은 시선들이 영화같이 지나간다.
아니 영화가 이 빛을 그린거라고 해야 맞는건가
애정하는 뮤스카이의 풍경들
#4
간신히 너무 늦지 않게 뮤스카이를 타고 주부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뮤스카이에서 숨을 돌리며 언니에게 카톡을 했다. 곤약젤리를 무사히 데려가고 있습니다!!!! 예에에에에에!!
그리고 공항.
애초에 쇼핑에도 일본 쇼핑리스트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던 인간이라 아주 제대로 고생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당장 내 손에 곤약젤리가 없으면 아주 아주 긴 궁시렁을 들을 게 분명했으니깐.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이렇게 무섭습니다ㅋ)
심지어 이 젤리들은 비행기내 반입금지 물품이라 배낭에 넣고 수하물로 부쳐야해서 가방을 한바탕 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어차피 배낭 인생이라 추가 수하물은 알아보지도 않았었는데 만약 추가운임이 들었더라면.... 아주 악몽이었겠어.
*봉지에 플라스틱 용기로 낱개포장 되어있는 이 곤약젤리는 요즘 반입이 어렵다고 들었다. 하지만 종종 선물로 사오는 경우가 있고 부산에 갔더니 국제시장에도 팔더라. 설레임처럼 생긴 용기에 담긴 형태는 반입이 가능하고 수입도 되고 있는데 올리브영에서 사 먹어보니 입구쪽이 열십자로 막혀 덩어리를 잘게 섭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있다. 통째로 먹을 때와 식감이 매우 달라서 더 사 먹지 않았는데 포장을 반으로 갈라 먹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ㅋ
이제보니 저 메타몽 하나는 사 올걸 그랬나 싶네
항공권을 발권한 뒤 그제서야 공항 내부가 눈에 들어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음식점도 많고 기념품샵도 잘 되어 있었다. 역시나 아름다운 지브리 기념품들에 한참 정신이 팔려있다가 밥을 먹기엔 좀 애매한 것 같아 선물과 간식만 몇가지 산 뒤 늦겠다 싶어 서둘러 출국장으로 향했다.
#5
이후 시간과 순서를 착각한 모지리는 비행기를 놓칠 뻔 했지만... 승무원분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제 시간에 탈 수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분주하게 다닌 일정에 지쳐서 창 밖을 내다보니 크고 작은 도시들의 불빛이 아름다웠다.
이동하는 시간을 때우기엔 지난 사진 지우기만한 게 없는데 한 장을 지우면서도 이 사진을 찍은 그 순간만큼은 그 때가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었을텐데, 지나고 잊혀지니 지워지는구나 싶어서 조금 슬퍼졌다.
#6
여행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허리와 목이 뻐근하도록 창 밖을 바라본다.
이 시간들을 떠나 보내기 싫다.
보내기 싫다 생각하면서도 이전과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낀다.
여행은 떠남이자 벗어남이었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썩 즐겁지 않은 시간이었던 이전에 비해
지금은 '아, 이제 돌아가는 구나. 출근이 언제지. 내일 뭘 해야되지' 떠올리다가 이것 또한 현실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내 여행도 현실이었어. 조금 지난 현실.
세계여행도 내겐 꿈보다는 살아가고 싶은 방법이자 겪어보고 싶은 삶의 순간들이다.
꿈은 삶이 주어지는 동안 제대로 살아있는 것, 생명력이 있는 삶이다.
'어떻게' 부분이 늘 고민이지만.
이제 곧 공항에 도착한다.
2017년 8월 5일 토요일 밤 8시 56분. 살아있기 좋은 밤이다.
#7
월요일
필름을 맡기러 가는 길에 버스를 기다리며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주머니에서 50엔이 나왔다.
동전 하나로 서울 한복판에서 여행의 기억들이 울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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